우리 기독교 안에 산상 수훈의 “팔복”를 전부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겠죠?아마 많을 것입니다.그러나 솔직히 십계 암기도 어려운 나에게는 두개 줄어드는데 팔복도 기억이 여전히 어렵습니다.그럼 이 기회에 기억하지 않고 나와 함께 이해할 방향으로 도전하고 보면 어떨까요?[마태 복음서 5장 산상 수훈에서 팔복]그 유명한 예수님 산상 수훈의 첫마디가 8가지 복을 받은 자에 관한 것입니다.여기서 소개되는 8가지 복은 순서도 있었고,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 배치를 단단히 해야겠어요.아래 첨부한 그림과 같이 배치한 뒤 천천히 생각하면 큰 유익이 있죠.
1.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처음의 출발입니다.기독교인이 된 계기와 과정을 면밀하고 정직하게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나한테 일어난 변화는 심령이 가난했다는 것입니다.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여기에서 시작합니다.그럼 어떤 것이 “심령이 가난한 “라고 하는 것인가?다름 아닌 세상의 수많은 인생 중에서 특히 나만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누가 뭐래도)실제 나는 그런 벌거벗고 있습니다.자신의 심령의 가운데에 구멍이 있는데 어떤 것이라도 좁히지 못하게 알았습니다.이때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끌려서 교회 공동체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우리 예수님은 이런 자에게 복이 있다”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합니다.2. 아이통인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날 변화지만 그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아이 부상하는 자입니다.왜냐하면 자신(심령)이 알몸 상태로 있을 뿐더러 그런 가운데도 속인 속에 “죄”가 많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분노와 악의와 오만이 가득한데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는 스스로 그 죄에 견딜 수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죄에 대한 자각은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요.이는 마치 혼자 크게 다치고 죽어 가는 사람이 마음이 뚜렷한 상태에서 자신의 몸에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고 나쁜 야수들이 자신의 오장 육부를 뜯어먹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인은 십자가의 죄 죽음을 통해서”위로한다”라고 하셨죠.3.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아이 통증 하는 자는 “자신의 부인”을 할 수밖에 없어, 온유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래서 눈에서 독기가 사라지고 몸의 혈기도 사라집니다.모든 것에 욕심도 버릴 수 있습니다.가장 대표적인 예는 모세입니다.40세 때 모세는 혈기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당시 자신의 동족을 보호하는 시중을 들었다고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이 특심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이집트인들을 때려죽여기까지 했습니다.여호와는 이런 모세를 황야로 몰아 그 혈기를 빼내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무려 40년간 그 작업을 했었습니다.그런데 너무 많은 마른 바람에 80세 때 여호와가 그를 불렀을 때는 가지 않게 고집을 부려서 여호와가 오히려 힘들었던 정도입니다.이런 온유한 자들에게 우리의 주인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 TO(규정상 정해진 인원)라는 말이 있습니다.세상을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반드시 적정량의 기독교 TO(마치 음식 중에 있는 소금처럼)이 없으면 안 됩니다.그들은 온유한 자들로 그들이 없으면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이 될 거에요.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반드시 적정 영역의 토지, 온유한 자가 지배하는 토지가 있고 병이나 부상을 하거나 곤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없으면 안 됩니다.그래서 신은 반드시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줍니다.4. 의에 굶주린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그런데”의사”란 무엇일까요?통상 우리가 굶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까?그리고 하나님의 속성과 성격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사랑” 아닙니까?사도 요한은 드러내고”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까지 했는데 왜 예수님은 “사랑(아가페)”에 굶주린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지 않고 굳이”의사”에 아주 주련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했을까요?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분이 그 아들이 되신 예수님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여호와 하나님은 “의사( 바른, righteousness)”입니다.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의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그 때문에 이해하기 쉬운 다른 용어로 표현해야 하는데 나는 의사에 가장 가까운 용어를 “신성”이라고 주장합니다.그리고 이를 더 풀어 말하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으로 “신이 보고 좋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우리 기독교인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아이통에서, 온유한 사람입니다.이런 사람들은 결국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하는지를 여실히 아는 자들입니다.무엇이 부족합니까?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부족하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항상, 날마다, 때마다 여호와 신을 갈망하고 있습니다.항상 여호와에게 주어지고 있고 여호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시편의 그 마른 사슴처럼… 그렇긴목 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허덕이는 울음을 들은 적은 있습니까?저는 다큐멘터리에서 견문한 적이 있습니다.그 소리는 놀라움입니다.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였지만 그 말을 듣자 나의 목도 탑니다.정말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이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인은 배 가득 차라고 하셨죠.
이거까지 4가지 복의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 신자에 대한 어떤 심령의 “상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이는 “존재”와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그래서 소극적입니다.그러나 그 후 4개의 복은 진정한 기독교”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이것은 그리스도 교도의 삶의 방향성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그래서 적극적입니다.그러나 결코 이 순서가 역전해서는 안 됩니다.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뭔가를 하기 전에 거기에 걸맞는 “존재”부터 된다고 말씀하신 때문입니다.기억해야 합니다.팔복에는 순서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거까지 4가지 복의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 신자에 대한 어떤 심령의 “상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이는 “존재”와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그래서 소극적입니다.그러나 그 후 4개의 복은 진정한 기독교”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이것은 그리스도 교도의 삶의 방향성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그래서 적극적입니다.그러나 결코 이 순서가 역전해서는 안 됩니다.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뭔가를 하기 전에 거기에 걸맞는 “존재”부터 된다고 말씀하신 때문입니다.기억해야 합니다.팔복에는 순서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 유니온의 매일 성경과 함께 묵상 분담을 하고 있습니다.23년을 비롯한 새해 목표의 하나가 올해 1년간 적어도 일주일에 1편의 묵상 나눔을 글로 써야 한다는 다짐했다.일종의 서원인 셈이죠.이것이 쌓이면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거에요.그리고 이런 나를 부신님이 좀 귀여워해서 줬으면 좋겠어요~^^(아멘~)